<?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꿈을 꾸는 이든교회</title>
		<link>https://www.edenchurch.net</link>
		<description>이든교회 홈페지</description>
		
				<item>
			<title><![CDATA[2026년 4월 5일/ 고린도전서 15:12~19/ 예수의 부활, 하나님의 사랑 고백]]></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6]]></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ST3U9o8JcEQ" title="2026년 4월 5일/ 부활주일/ 이든교회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고린도전서 15:12~19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16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1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blockquote>

이번 주 어떤 목회자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일상적으로 말하는 신앙적 지식이 하나의 깨달음으로 질적 변화를 이룬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정확한 표현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대화의 요점은 “복음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선포”라는 것을 계속 경험하는 것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라는 것을 늘 경험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말은 너무도 자주, 쉽게, 다 이해하듯 말하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 말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계속 전달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뇌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 뇌과학의 연구 결과입니다. 사람의 뇌는 여러가지 경험에 의하여 그 기능과 구조가 많은 변화를 보이는데, 이것을 ｢뇌의 가소성(plasticity of brain)｣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얻게 되면 뇌구조가 달라지고, 가짜 뉴스에 계속 노출되면 어느 순간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단이 말하는 거짓 메시지에 계속 노출되면 아무리 지적인 사람도 변하게 됩니다. 뇌는 경험에 따라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 즉 self-talk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뇌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신앙에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대체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의미를 금세 놓쳐버리고 살아갑니다. 저의 경우, 동료 목사님이 본인의 교회 교우들과 함께 “①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습니다. ②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③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아멘”이라는 고백을 매주 나누면서 교우들이 평화를 누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체 그 당연한 말을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며 그 교회의 평화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라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계속 전달하는 것이 결국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음에 다시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념적 활동과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지향하며 존재 자체의 평화를 누리는 무념적 활동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안에서 재조형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굳건히 믿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벽히 거슬렀기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신 21:22~23)가, 완벽하게 의로운 자의 부활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아라비아 광야와 다마스쿠스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냅니다.(갈 1:16~17)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예수 부활의 의미를 오늘 본문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미 바울이 속한 유대인의 신앙 체계 안에 ‘부활’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부활’은 무엇이었을까요?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주변 제국들에 의해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기원전 2세기경, 헬라 제국의 극심한 박해로 인해 야훼 하나님을 믿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유대인들은 순교라는 개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교한 “의인들”을 “마지막 때”에 부활시킬 것이라고 굳건히 믿게 됩니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부활’은 마지막 최종적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완벽한 인정이기에 매우 간절한 형태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물론 ‘부활’을 자신이 선택한 율법의 길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예수의 ‘부활’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이고, 최종적 결정이 이뤄진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은 바울이 믿어왔던 것과 전혀 다른 길이었기에, 예수의 길이 ‘부활’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기까지 그에게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라고 확인해줍니다. 바울은 부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예수의 길을 반추하면서, 예수가 어떻게 치열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길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먹이셨던 것,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알리셨던 것, 정결 율법에서 저촉되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진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만지고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한 것, 그저 소유물이라 여겨졌던 어린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가르친 것, 겨자씨와 누룩과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결국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낸다고 가르친 것, 강도만난 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람이라면 사마리아인이라고 해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것 등등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예수를 통해 분명하게 이해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심,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심(14절)”이 없다면, 예수의 길을 인정하시고 그 길로 살아가도록 주신 믿음이 다 헛된 것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좀더 확장하고자 합니다. “예수의 부활, 우리가 계속해서 들어아 할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길이 옳다는 인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리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쉐마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는 것인데, 예수는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끝없이 사랑하시기에 동시에 지극히 작은 자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삶을 살았던 예수를 하나님께서 부활시켰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예수처럼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부활을 믿기에 바울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주는 엄청난 위로가 있습니다. 그 힘이 매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고백을 계속 기억하는 우리가 됩시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42:1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29일/ 예레미야 32:6~15/ 우리를 살리실 하나님을 신뢰하며]]></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o7bQ1kCl5gQ" title="2026년 3월 29일/ 종려주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예레미야 32:6~15
6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7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8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근위대 뜰 안으로 나를 찾아와서, 내게 부탁하였다. 베냐민 지방의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나더러 사라고 하였다. 그 밭을 소유할 권리도 나에게 있고, 그 밭을 유산으로 사들일 권리도 나에게 있으니, 그 밭을 사서 내 밭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 때에 나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임을 깨달았다. 9 나는 숙부의 아들 하나멜에게서 아나돗에 있는 그 밭을 사고, 그 값으로 그에게 은 열일곱 세겔을 달아 주었다. 10 그 때에 나는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봉인하고, 증인들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 11 그리고 나는 법과 규례에 따라서 봉인된 매매계약서를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와 함께 받았다. 12 그리고 나는,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그 매매계약서에 서명한 증인들과 근위대 뜰 안에 앉아 있던 모든 유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매매계약서를 마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인 바룩에게 넘겨 주고, 13 또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바룩에게 부탁하였다. 14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이 증서들 곧 봉인된 매매계약서와 봉인되지 않은 계약서를 받아서, 옹기그릇에 담아 여러 날 동안 보관하여라. 15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blockquote>

3.1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을 선언한 종교계 대표 33인이 있습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16명, 불교인은 2명, 그리고 천도교인은 15명이었습니다. 천도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손병희가 발전시킨 민족 종교로 1905년에 그 이름을 ‘천도교’로 개편한 종교입니다. 동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학, 즉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서학이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하고, “신의 심판 이후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하니 많은 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농민 등은 이에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조상의 죽음에 대한 서학의 태도와 무언가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서학의 신관, 역사 인식, 구원관 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며 동학이 등장한 것입니다. 동학의 중요한 사상 중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와 ‘후천개벽(後天開闢)/ 낡은 세상(선천)이 끝나고 차별이 없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세상(후천)이 온다.’등이 있습니다. 동학은 농민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에 농민들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힘으로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이 고종의 황실에 위해를 가한다고 판단하자, 고종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덩달아 일본도 조선에 무력을 동원하여 진입하게 됩니다. 부패한 봉건 사회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난 농민들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관군과 근대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연합군은 농민군에게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채, 죽을 것을 알면서도 기관총을 앞세운 관군과 일본군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결국 수만 명의 농민군 중 살아남은 자는 수백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한 후 혁명은 좌절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정신은 이후 3.1운동, 5.18민주항쟁 등의 뿌리가 됩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모든 현실적 조건이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소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절망의 순간, 소망을 말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용기를 내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의 길을 인정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초기교회의 이해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가운데 보여주는 예수의 행동은 소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복음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소외될까 두려움을 가졌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15:34에서 예수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이길 소망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인정해주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서 겪는 처절한 고통을 순간은 그 소망마저 사라지게 만들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마지막 육성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누가복음 23:46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고 전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겪은 예수의 이 치열한 갈등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는 거리감 있는 표현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버지”라고 부르며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수의 소망은 절망의 순간을 통과하여 확인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완전한 의지함 속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1년 전인 시드기야왕 제 십년, 예루살렘은 바벨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었고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갇힌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리라는 패배주의적 예언을하여 국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에 분노한 고관들은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남 유다 권력자들이 듣기에, 예레미야의 예언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줄곧 절망만을 말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31:17을 보면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절망을 통과해야 회복이 되리라는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러한 소망을 진심으로 품었던 것일까요? 절망의 선포는 권력자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눈앞에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를 보면 민중들도, 예레미야도 포로로 잡혀가는 절망을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하나의 상징을 보여 주십니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찾아와서,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에 있는 하나멜의 밭을 유산으로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인데, 그 말을 듣고 매매계약서를 쓰고, 증인을 세우고, 땅 값을 치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눈앞의 바빌로니아 제국 군대를 보게 되면,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사람은 곧 국가가 무너져내려 제국에게 땅을 빼앗길 것임을 금방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빼앗겨 버릴 땅을, 지금 돈을 주고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요? 국가의 패망을 선포했기에 투옥된 예레미야에게 친척인 하나멜이 찾아와서 “베냐민땅 제 밭을 사시죠.(32:8)”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사기입니다. 빼앗길 것이 뻔한 땅을, 유산을 상속하라는 이유를 들어 팔아 돈이라도 챙기려는 행동입니다. 하나멜은 포로에서 돌아오리라는 ‘희망’ 따위는 품지 않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도 비슷했습니다. 32:25을 보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하셨습니까?” 예레미야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질문, 예레미야의 질문 모두 중요합니다. 오늘의 절망을 하나님께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도 십자가를 통과한 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리라는 소망을, 예레미야도 바벨론 포로의 시기를 통과한 후 하나님께서 다시 민족을 회복시키시리라는 소망을 말했지만, 분명하게도 그 소망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회복의 희망을 말하고, 회복의 희망을 땅을 사는 것으로 보여주면서도, 자신은 그런 회복을 희망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기대하는, 예레미야가 기대하는 희망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도, 예레미야도 마침내 ‘살리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마침내 우리를 살리실 것이라는 희망을 완성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길을 따르는 우리도 마침내 우리를 살리실 희망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고난을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39: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22일/ 골로새서 1:9~20/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4]]></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w3GJ0O24Poc" title="2026년 3월 22일/ 사순절 제5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골로새서 1:9~20
9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10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11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13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14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blockquote>

우리는 2026년의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사순절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순시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단 하루의 날이 아니라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사순절 또는 사순시기를 매우 의미있는 기간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절 또는 사순시기가 시작된 이유와 어떤 의미의 변화가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교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날은 성탄절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한 인물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은 신성화의 중요한 작업입니다. 제2성서에는 예수의 탄생은 기록하지만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아예 예수의 탄생을 기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2세기 초반, 초기교회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기념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기독인들이 예수를 드높이기 위한 노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기독교 공인 이전인 2세기 중반이 지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 탄생의 일자를 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절은 다릅니다. 부활절은 초기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고난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축제를 지내는 날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교회 내부의 여러 분열로 인해 부활절을 정하는 방법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부활절을 정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지만 부활절은 기독 신앙을 가장 강력하게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교회 교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에게 자신을 동기화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초기교회 교인들은 세례를 통해 부활에 동참하기 위한 사순기간의 준비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1세기에는 사순절을 40시간만 지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계셨던 40시간과 일치시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3세기에 이르러서는 부활절 전 한 주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키다가 나중에 30일로 연장되었으며, 마침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40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 어거스틴 이후, 사순절은 세례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수난에 머무르는 기간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 성인 세례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사순기간은 예수의 삶과 동기화하는 의미였는데, 그것이 변하여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참회하는 것으로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사순기간은 고난보다는 예수의 삶에 더욱 동기화하는 기간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바울의 예수 이해를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의 예수에 대한 이해도 살펴보려 합니다. 
바울은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극적 전환을 이룬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나눔의 제목이기도 한 15절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표현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그 어떤 형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예수에게서 보았다는 그 말은 바울이 자신의 유일한 토대로 여겼던 유대의 율법을 이미 넘어서버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바울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채우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 깨닫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을 점점 더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 바울은, 하나님을 율법이 정한 규칙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 예수의 삶에 대한 공부를 통해 점점 더 알아갔습니다. 바울의 이 권면은 모두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매우 심오한 고백을 더합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야훼 하나님은 해방시켜주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그들의 삶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들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포함한 온 우주를 다스리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모든 것이 파괴된 바벨론 포로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새로운 역사를 다시 시작하실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로 작동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포로 시기 바벨론의 창조신화는 신들의 전쟁의 결과, 패배한 신을 가지고 하늘과 땅이 만들어집니다. 또한 신들이 힘든 노동을 대신 시키기 위해 패배한 신의 피를 섞어 인간을 만들어 노예로 부린다고 하였습니다. 폭력을 통해 만들어진 세상 속에서 약자들은 계속해서 착취를 당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창조신화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를 제거하시고,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세상을 운영하도록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그야말로 세상의 가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고난이 가득한 삶의 시간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다시 세상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창조신앙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기본값이었고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앞당기는 것은 율법의 완벽한 준수라고 굳건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후, 바울은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뀝니다. 예수의 삶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삶이 모든 창조의 토대, 즉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토대라고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이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수치스러운 모습을 예수께서 대신 감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한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가 보여준 구체적 삶의 모습이 스스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예수가 통과한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이 평화를 이루기 위한 통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화해하기 위해서, 즉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의 길을 보여주셨다는 것이 바울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 없이 바울은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잘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를 잘 살펴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35: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4월 5일/ 부활주일/ 이든교회 창립14주년]]></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3]]></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9"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405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20"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405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28: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월 29일/ 종려주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2]]></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6"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329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7"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329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27: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22일/ 사순절 제5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1]]></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3"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322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4"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4/20260322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6 Apr 2026 01:26: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15일/ 사순절 제4주/ 이든교회 2026년 2차 아웃팅]]></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700]]></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9"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15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10"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15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9 Mar 2026 00:38: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8일/ 사순절 제3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9]]></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6"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08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7"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08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5:48: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1일/ 사순절 제2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8]]></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0"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01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1"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301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5:47:3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22일/ 사순절 제1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7]]></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3"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222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404"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3/20260222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5:45:2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8일/ 시편 128:1~6/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6]]></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9hla2RV5L2w" title="2026년 3월 8일/ 사순절 제3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시편 128:1~6
1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2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네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4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복을 받는다. 5 주님께서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기를 빈다. 평생토록 너는, 예루살렘이 받은 은총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 6 아들딸 손자손녀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blockquote>
지난주말에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이 전쟁에 “Epic Fury”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Epic의 의미에 “장대한, 서사적”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국내 언론에서는 “장대한 분노”라고 번역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Epic은 구어적 표현으로 “쩌는”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 전쟁이 멋진 분노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란을 상대로 하는 작전을 공식적으로 “Roaring Lion”, 즉 “포효하는 사자”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49:8~12에는 야곱이 자신의 아들 중 유다에게 유언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9절에서 “유다여,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어 먹고, 굴로 되돌아 갈 것이다...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으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후 유다는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왕족이 됩니다. 이번 작전명은 여기서 연관된 것입니다. 작년 6월에 이미 이란을 한 차례 공격했을 때의 작전명이 “Rising Lion”, 즉 “떠오르는 사자”였던 것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적이 완전히 제거 되어야 평화가 온다고 말하며 ‘예방 전쟁’이라고 말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루더라도, 전쟁을 일으킨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떠한지는 이 명칭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백악관은 이 전쟁이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월함”을 보여준다고 소개합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왕으로서의 권력 행사”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르시시즘에 빠져 힘으로 상대를 짓밟는 것을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힘을 숭배하며 세계를 무력으로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 현실이 너무 어처구니 없기에, 오늘은 그들 종교의 경전인 성경은 어떤 세상을 그리워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더불어 시편이 말하는 평화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128편을 갈무리하는 본문 6절 후반부는 말 그대로 매우 간절한 기원입니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May peace be upon Israel/ Shalom al Israel” 이와 똑같은 표현은 시편 125:5에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125편과 128편은 어떤 모습을 평화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시편 120~134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따라 매년 유월절과 같은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하는데 바로 이때 부르도록 기록된 시편인 것입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도록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제2성전을 재건한 후, 야훼 신앙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절기를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 순례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성전으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128편은 거대 제국의 논리를 벗어난 세상,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야훼를 경외하며 동행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자기 손으로 일한 만큼 먹을 것을 얻는 세상입니다. 자기의 성실한 수고가 온전한 결실로 돌아오는 세상을 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여 얻은 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내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손으로 일한 만큼 먹는 것은 노동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먹을 것을 얻으라는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가 외면 당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고에 따른 적실한 열매가 주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야훼로부터 받은 율법을 잘 지키게 되면 바로 이런 모습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신명기 28:2은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15:4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모두가 야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모두가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땀을 흘릴 현장이 있고, 그 노동의 결과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되어 모든 가족이 평화로운 식탁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은 노동할 곳이 있고, 노동의 결실이 있으며, 그것이 따뜻한 밥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복이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야훼를 경외하고 그 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노래하며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이 노래하며 기대하는 진정한 복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흘린 땀의 대가를 내 식탁에 앉은 자식들과 아내가 온전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 노래 마지막 구절의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후렴구는 이러한 모습이 평화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동시에 이 노래는 자신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거대 제국이 만들어 내는 세계사적 혼란이 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이 후렴구는 시편 125:5에도 똑같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125편은 어떤 노래일까요? 3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의인이 불의한 일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면, 의인이 분깃으로 받은 그 땅에서 악인이 그 권세를 부리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이 노래에는 악인이 의인의 삶의 자리를 침탈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이 4~5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선한 사람과 그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비틀거리면서 굽은 길을 가는 자를 벌하실 때에, 악한 일을 하는 자도 함께 벌받게 해주십시오.” 자신의 수고가 온전한 결실로 돌아오는 세상, 그리고 악한 자들의 흉계가 선한 이들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노래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세상을 이것이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점입니다. 같은 가사와 멜로디로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함께 갈망하게 되고 그런 나라를 향해 함께 걸어갈 힘을 얻게 됩니다. 즉 공동체적 가치관이 형성된다는 점입니다. 포로기 제국의 수탈을 경험한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다시 평화를 되찾고자 함께 부르는 노래에는 분명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은, 기독교 국가 미국은 그런 평화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힘이 곧 정의라며, 압도적인 무력 앞에 굴복할 때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며 세상을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야훼와는 무관한, 시편 128편과는 무관한 악마의 노래일 뿐입니다.
오늘날 열심히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워킹 푸어(working poor)”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일자리를 가지지 못해서 빈곤한 것이 아니라, 취업 상태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음에도 빈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열심히 일할수록 더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는 한술 더 뜹니다. 지금 얻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얻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28:2의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는다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복”은 개인의 무한 경쟁을 통해 얻게 되는 승리가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가 각자의 성실한 삶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이들은 이 노래에 걸맞는 세상을 함께 꿈꾸며 함께 노래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경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 말고, 함께 성실한 수고의 결실을 누리는 평화의 세상을 노래하며 꿈꿀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5:37: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3월 1일/ 누가복음 7:1~10/ 예수가 감탄한 "믿음", 내 믿음과 다른]]></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5]]></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wQln2PKvSck" title="2026년 3월 1일/ 사순절 제2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누가복음 7:1~10
1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2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 3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4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6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8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9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blockquote>
지난주간, 세 명의 목회자가 만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다음 달이면 14년을 버텨온 이든교회의 목회자인 저와, 2018년에 시작한 다양한 청년 중심의 교회의 목회자와, 이제 막 결혼했고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목회자 해서 이렇게 세 명이 만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제 안에 질문이 떠올랐고 잠사 나눴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왜 기독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요?”라고 물어야 하고, 교회를 전혀 모르는 청년들이 “왜 기독신앙을 가져야 해요?”라고 물을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이든교회에서 함께 예수의 길을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져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왜 기독신앙을 가지고 있나요? 이 질문은 다양한 버전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기독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을 선택하셨나요? 기독교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친구 연인과의 관계 때문인가요, 아니면 기독교가 보여주는 예수의 길이 진짜 희망이 된다고 깨닫기 때문인가요? 오늘은 복음서에 나오는 매우 독특한 장면을 통해 “예수가 감탄한 믿음”은 대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전까지의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선언을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4장), 비로소 제자들을 하나둘씩 모아서 결국 12제자를 부르시고(6장),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내용의 설교를 평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이제 7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와 12제자들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격적인 예수의 첫 사역이 유대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압제자인 로마 백부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질병과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는 일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권력자와 관계된 장면이 두 군데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로 오늘 본문으로, 근처 시리아에 주둔하는 로마 군단(legion)과 연결되어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 주둔하던 “백부장”이 자신의 종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4:46~53에 등장하는데, 갈릴리의 분봉와 헤롯 안티파스가 가버나움에 파견한 “왕의 신하”가 자신의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자신의 종의 병을 고쳐달라는 요구를 한 후 예수께 놀라운 칭찬을 받았고(눅 7:9), 요한복음의 “왕의 신하”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는 요청을 한 후 꾸지람을 듣습니다(요 4:48). 오늘 본문의 “백부장”에게 예수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고 하시며 감탄하신 반면에, 요한복음의 “왕의 신하”에게는 “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요 4:48)” 질책을 하십니다. 매우 상징적인 이 두 장면을 통해서 예수께서 감탄하신 “백부장”의 “믿음”의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당시 갈릴리의 완벽한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 식민지에서 로마의 힘을 제대로 느끼게 만드는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느낌이 다릅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는 고넬료는 유대인이 믿는 야훼라는 신을 따르는 ‘경건한 사람(행 10:2)’이었고, 오늘 본문 속 백부장도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5절은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는 대체 야훼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더 이상 로마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야훼의 길을 따르기로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자, 예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 종이 백부장에게 왜 중요한 사람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어느 민족인지 알 수 없는 지극히 작고, 여리고, 부족한 종 하나를 소중히 여기면서 예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렇게 작고, 여리고, 부족한 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태도는 로마의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은 정복 전쟁을 가장 최전선에서 치르는 전투의 달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렇게 작고 여리고 부족한 종 하나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살아왔던 삶의 가치와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요? 바로 야훼 하나님의 모습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작은 것을 불쌍히 여기는 신의 뜻에 대해 완전히 동의했습니다. 그랬기에 갈릴리의 촌부인 예수라 할지라도 자신의 종을 고칠 수만 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8장에는 등장하지 않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1)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어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권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유대 장로들은 예수께 와서, 백부장이 유대 백성을 사랑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적극적으로 탄원해 줍니다. 즉, 백부장은 자신의 인품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께 도움을 요청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다시 2)친구들을 예수께 보냅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주님을 곁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며 말씀만 하셔서 종을 낫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권력으로 일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백부장이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을 부리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는 장면을 세세하게 소개합니다. 백부장은 야훼 하나님을 알게 된 이후, 그가 살아왔던 삶의 가치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여 작고 여리고 부족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더불어 백부장이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마저 기꺼이 포기합니다. 예수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다 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보지 못한 백부장의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 백부장은 깨달았습니다. 즉 작고 여리고 부족한 존재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힘을 가졌으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겸손히 낮아지신 하나님을 깨닫고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으로 보시며 감탄하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왕의 신하”는 어쩌면 오늘날 나의 “믿음”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은 위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적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그 모습을 “믿음”이라고 보지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 4:53은 “왕의 신하”와 온 집안에 뒤늦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그도 백부장의 “믿음”의 길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이 마침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비로소 기독신앙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길을 용감히 선택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4:56: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22일/ 이사야 57:14~21/ 현실 인정? 하나님 나라 기대!]]></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4]]></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6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Oq7xflz5a5s" title="2026년 2월 22일/ 사순절 제1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 이사야 57:14~21
14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15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16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17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18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19 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고쳐 주마." 20 그러나 악인들은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고요히 쉬지 못하니, 성난 바다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아 올릴 뿐이다. 21 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악인들에게는 평화가 없다."</blockquote>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상적 경향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모더니즘”을 지났다는 의미이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더니즘”, 즉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며 그것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놓은 구조(규칙, 권위, 규율, 통제 등)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모더니즘 세계가 전쟁 등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자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물으며 반항해서 등장하는 사상적 경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근대성”은 어떤 시기를 거쳐 형성된 것일까요? 혹자는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을 근대의 시작으로 삼기도하고, 철학계에서는 17세기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혁명, 즉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표현되는 주체적인 성찰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가 하면,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근대의 출발로 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해서 “근대”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만들어진 시기를 가늠해볼 수 는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식계의 최대 쟁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있습니다. 2024년에 작고한 미국의 프레드릭 제임슨이라는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입니다. 그는 자본주의 자체가 “근대”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빼놓고 “근대성”을 논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는 근대성의 핵심이며 전 세계적으로 단일한 근대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권위를 부정하고 해체하려는 창조적‧반항적 시도로 보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최후의 단계에 이르러 결국 앞선 시대가 식민화하지 못한 것까지 모조리 식민화함으로써 훨씬 더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후기 자본주의)에 도달했고, 자본이 문화의 심층까지 삼킨 현상으로 봅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2003년 ｢뉴 레프트 리뷰｣)” 역시 작고한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는 자신의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이 구절을 떠올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망가지는 세상 속에서 목숨을 걸고 ‘희망의 상징’이 되는 아기를 구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글들과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져봅시다. 오늘날 우리는 야만적이고 불평등하지만,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지금의 상황을 최선으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완벽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디에도 ‘돈’ 이외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든교우 여러분. 무너져 내린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현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희망’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3이사야에 해당합니다. 이사야 1~39장은 주전 8세기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이사야의 상황은 반영하지만, 40~55장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유다 공동체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56~66장은 더 이상 바벨론이 아니라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꿈과 기대를 안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구원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들은 누구일까요? 56:10~11은 분명하게 그 세력들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파수꾼과 지도자들입니다. 그런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감각이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57:1이 알려줍니다. 의인이 죽어도 그것을 마음에 두는 사람이 없고, 자비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57:3은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점쟁이의 자식들, 간통하는 자와 창녀의 씨들.” 그들은 야훼를 섬긴다고 말하는 종교 행위와 동시에 우상숭배를 일삼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제3이사야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과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을 만들어 놓은 이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겪게 되는 고통과 부르짖음이 가득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제3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진심을 전달하는 예언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고자 하시는 공평과 공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사라지면, 결국 체념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현실에 낙심하고 실망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이제 곧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절대로 포기히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현실에서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삶을 살아가라고 요청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의의 구원이 임하고, 이스라엘이 세상 가운데 영광이 되며 이방인도 하나님께 나아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공평과 공의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이뤄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닐까요? 59:1~2은 하나님의 구원이 지연되는 이유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도 아니다. 오직, 너희의 죄악 때문이다”라고 알려줍니다. 문제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참혹한 현실을 그저 최선이라고 받아들이며 살도록 만드는 시대의 권력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4~19절은 만들어진 참혹한 현실을 사는 가운데 죄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의 문제를 깨닫고 돌이키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평화”를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20~21절은 그런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제3이사야는 참혹한 현실을 전부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요청합니다.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나라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제3이사야의 의도를 다시 한번 중요하게 일깨웁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 4:18~19 말씀을 이사야 61:1~2에서 그대로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 다시금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의 시대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현실을 전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희망의 하나님 나라를 기억하도록 초청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을 받아들인 이들은 역사 속 수많은 고난 앞에서도 현실을 최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며 현실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프레데릭 제임슨의 말처럼 이 세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고 그려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4:51: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15일/ 렘20:7~10, 딤후4:6~8, 눅6:27~36/ 나는 '그런' 하나님이 싫지만(소일-이든 연합예배)]]></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3]]></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OdkN9_MorE" title="2026년 2월 15일/ 산상변모주일/ 소일-이든교회 연합예배/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예레미야 20:7~10/ 디모데후서 4:6~8/ 누가복음 6:27~36
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10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
6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31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32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34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blockquote>
2018년에 개봉한 ｢나는 예수님이 싫다｣라는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당시 22세의 나이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평단의 반응도 호의적이었고 무엇보다 일본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영화가 촬영된 곳은 도쿄에서 북서쪽 내륙에 위치한 군마현입니다. 도쿄에 살던 ‘유라’라는 아이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부모님과 함께 이곳으로 와서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됩니다. 가족은 지극히 일본적인 불교/신도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유라가 전학하여 가게 되는 작은 학교는 고풍스런 예배실과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전통적인 기독교 학교였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시골 마을에 오랜 전통을 간직한 ‘미션스쿨’이 있는 것일까요? 군마현이라는 지역에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군마현은 사실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대학인 도시샤대학의 설립자인 니지마 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간조가 군마현 출신입니다.  일본의 기독교라 하면 소설 ｢침묵｣의 지역적 배경이 되는 규슈 지역에서 심하게 박해를 받던 '카쿠레 키리시탄(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군마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인 신앙 추구의 성격이 강한 곳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이 군마현 시골이지만 ‘미션스쿨’이 있는 것이지요. 이 학교에 다니게 된 유라는 처음으로 기독교 예배에 참여하게 되고 기독교식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유라의 첫 기도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였습니다. 바로 그때, 유라에게만 보이는 조그마한 예수가 등장합니다. 이후 유라에게는 카즈마라는 좋은 친구가 생깁니다. 이후에도 유라의 곁에 조그마한 예수가 종종 등장하게 되고 유라의 소박한 기도는 응답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카즈마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라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카즈마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결국 카즈마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실망한 유라는 결국 학교에서 열린 카즈마 고별식에서 고별사를 하고 기도하던 중 나타난 작은 예수를 기도를 준비하던 손으로 쳐서 사라지게 만듭니다. 이 영화의 시작 장면에는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가 창호지를 바른 창문을 손가락으로 뚫고 밖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새벽에 일어난 유라가 새롭게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구멍을 뚫고 밖을 바라보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아마 감독은 비록 기도를 들어주지 않기에 ｢나는 예수님이 싫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는 작은 구멍을 통해 보이는 세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함께 축구를 하는 유라와 카즈마를 하늘에서 바라보는 예수의 실루엣을 보여주며 끝이납니다. 영화 제목은 ｢나는 예수님이 싫다｣지만, 여기서 예수는 ‘신’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싫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기도에도 응답하던 친근했던 ‘신’이 정작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하는 기도에 침묵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에 대한 이러한 의심과 갈등 그리고 미움의 감정은 신을 따르든, 신을 떠나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 신앙의 수준이 높아져 신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다시 한번 하나님이 싫다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은총과 자비, 그 자체”이심을 깨닫게 되고난 후, ‘그런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 속 예레미야가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부터 독특합니다. 예레미야 1:5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고통을 당하는 예언자로 사용하기 위해 유전자를 배치하고 기질을 형성하여 태어나게 하신 것이라면, 예레미야는 군소리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1:6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슬프도소이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아닙니다’로 번역된 원문은 깊은 탄식인 “아~”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개역성경은 “슬프도소이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의 순간에 깊은 탄식을 먼저 내뱉으며 자기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싫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왜 싫다고 표현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시켜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하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국노라고 불리며 엄청난 박해를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9절에서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오기만 하는 하나님께서 맡긴 일이 싫었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일까요? 9절 후반부를 보면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압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말씀하시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회개조차 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실 것을 압니다. 예레미야 50:4을 보면 “그 날이 오고,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이 다 함께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두를 은총과 자비로 품어주실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순간에 “슬프다”고 말하며 싫다는 것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집요하십니다. 그렇게 싫다고 하는 예레미야를 끝까지 불러서 일을 맡기십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필요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은총과 자비로 모두를 품으실 때까지 세상과 줄다리기를 하며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토닥여줄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겠지요. 그러나 마침내 온 세상을 은총과 자비로 품으실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던 예레미야는 ‘그런 하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또 한번 보여주는 강렬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적국안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가서 재앙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적국에 임하는 재앙이라면 우리나라 독립 투사들이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라도 가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치열하게 거절합니다. 마침내 니느웨의 정반대인 스페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내고는 결국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게 됩니다. 그런데 요나서 3:10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에 대한 요나의 응답은 요나서 4:2에 등장합니다.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런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계속해서 설득하려고 하시면서 요나서는 끝납니다. 왜 하나님은 끝까지 예레미야를 불러서, 요나를 불러서 온몸으로 싫다고 표현하는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것일까요? 
요나의 이야기는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30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과 같이, 인자 곧 나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는 자신이 요나와 같은 궤적을 거쳤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도 하나님과 치열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요나의 고민에서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통과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6:35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예수의 고백과 같이, 예수는 분명 요나가 걸었던 궤적을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일으킬 결과를 알고 있었던 요나는 ‘그런 하나님’이 싫다고 말했고, 예수도 요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만큼 그 길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는 요나의 이해에서 머물지 않고 통과했습니다. 36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의 요청은 요나가 싫어했던, 예레미야가 견디기 어려워했던 그 하나님의 모습을 모두가 닮아가기를 요청하는 것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든교회 초창기, 예레미야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던 도중 저는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 용서하시겠다고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반항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들은 아직 잘못했다고 돌이키지조차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싫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은총과 자비로 버텨주고 계시지 않으면, 나 또한 돌아갈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다 이해하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은총과 자비의 하나님이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 과정이 ｢나는 예수님이 싫다｣가 보여주는 신에 대한 의심과 갈등 그리고 미움의 감정을 통과한 후에, 다시 한번 통과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은총과 자비, 그 자체”이심을 깨닫게 되고난 후, ‘그런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요나의 불만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예수는 우리에게도 그 하나님의 자비를 살아낼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품고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과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현하는 삶을 사는 것은 대체 어떤 ‘이득’이 있는 것일까요?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본의 이득, 시간의 이득, 권력의 이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이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실을 쌓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손해받기를 감수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익’이 줄어드는 것이 반드시 ‘손해’인 것일까요?

바울이 보여준 극적인 전환은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요나가 겪었고 예수가 겪었던 그 시간, 3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합니다. 이후 예수의 깨달음을 자신도 얻게되자 그는 최선을 다해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삶을 마감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느끼면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후서 4:7에서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길을 따라 살아간 삶은 분명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세상에 보여주는 노력은 분명하게도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가 깨달은 ‘그런 하나님’이 싫었지만, 마침내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자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A.J.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는 매우 인간적이고, 완고하게 정직하고, 목숨걸고 불의에 저항하고, 의심하기를 두려워하지 하지 않는 사제 프랜시스 치점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누가 진정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치점 신부는 교리와 제도에 둘러싸인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를 떠나 35년간 중국 선교사로 살아갑니다. 이 시기에 치점 신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철저한 무신론자인 의사 윌리 탈록과 함께 사람들을 고치던 중 그만 탈록이 페스트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 탈록과 치점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상하지, 아직도 신이 믿어지지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느님께서 자네를 믿을 텐데.”/ “이 사람아 무리하지 말게. 나는 회개하지 않아.” “인간의 괴로움, 그게 다 회개하는 행위라네.” 마침내 탈록은 치점에게 천국으로 보내려고 들볶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숨을 거둡니다. 소설 안에서 치점은 “주님, 이번만은 주님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소설 속 치점의 모습은 인간을 감싸안는 하나님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믿는다”는 말은 제가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이 순간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면 이 땅 위에서든, 하늘에서든 천국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예수께서 다볼산이 되었든, 헬몬산이 되었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가 그 모습의 변화한 것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예수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께서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꾸셨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Thu, 12 Mar 2026 04:44:3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15일/ 산상변모주일/ 소일-이든교회 연합예배]]></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2]]></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83"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60215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84"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60215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Sat, 14 Feb 2026 14:28: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8일/ 마태복음 25:31~46/ 예수 천국, 불신 지옥??]]></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1]]></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SPYjzduRVrI" title="2026년 2월 8일/ 주현 후 제5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blockquote>]]></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9 Feb 2026 07:35: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1일/ 마가복음 8:34~38/ 친구로서 대신 지는 십자가]]></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90]]></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800" height="600" src="https://www.youtube.com/embed/4oTzQ2p25es" title="2026년 2월 1일/ 주현 후 제4주/ 주일 말씀 나눔"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blockquote>마가복음 8:34~38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blockquote>

지금 우리는 교회력으로 주현절의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께서 드디어 등장하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서방기독교는 동방박사가 예수를 찾아온 때를 주현절로 보지만 동방기독교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때,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진정으로 등장했다고 여기며 이 날을 주현절로 봅니다. 동방기독교를 이어가는 정교회가 보편적인 국가에서는 주현절에 중요한 행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십자가 찾기” 행사입니다. 올해에도 미국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진행하는 제120회 주현절 축제가 있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의 타폰 스프링스라는 작은 도시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매년 1월 6일, 즉 주현절에 스프링 바이유에서 열리는 축복식입니다. 주현절 미사가 끝나면 행렬이 스프링 바이유로 이동을 하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날리고 나면 대주교가 흰 십자가를 던집니다. 그러면 16~18세 청년들이 십자가를 건져올리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가장 먼저 찾는 청년은 하나님으로부터 1년 동안 축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억하는 이 축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축복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이렇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봅시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축복의 상징입니까, 부적입니까, 아니면 사랑입니까?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십자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중에서, 제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속”입니다. 개역개정으로 마태복음 20:28과 마가복음 10:45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새번역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기독교는 “대속”이라는 말을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예수가 대신 받아 죽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렀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기독인들에게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것은 신앙의 전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곧바로 벽에 부딪칩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십자가를 “대속”으로만 이해할 경우, 예수가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대체 우리는 누구의 죄를 대신 치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대속’으로 번역된 ‘lytron’은 ‘몸값’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대속”이라는 개념은 1098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개념입니다. 안셀무스는 중세 시대, 신앙과 이성 사이에 다리를 놓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자입니다. 이성의 빛 안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기에,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책에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중세 봉건 사회의 영주와 봉신 간의 관계를 모형으로 삼았습니다. 봉신이 영주의 법을 어겼을 때, 영주가 그냥 용서해버리면 불순종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퍼져 사회 질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봉신은 불순종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르도록 해야 영주의 명예도 지켜지고, 법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적용합니다. 결국 죄 없이 성육신 하신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며, 안셀무스의 시대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설명이었습니다(안셀무스는 사랑의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 그러나 동방기독교는 “대속” 교리를 모릅니다. 기독교가 서방기독교와 동방기독교로 분열된 것이 1054년이었고, 안셀무스는 1098년에 이런 이론을 펼쳤으니 동방기독교가 십자가를 대속이라는 무거운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축복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갑니다. 그렇게 안셀무스의 설명은 대부분의 서방기독교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 “대속”은 하나님이 불순종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도록 하는 전제군주의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대속”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만을 중요하게 만들고, 예수의 삶을 배우고 따르는 것을 무의미하게 여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십자가를 “대속” 교리로 읽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1)오병이어 사건으로 민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거절하신 후, 2)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이 예수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자 그렇게 이해하지 말라고 하신 후, 비로소 3)자신이 권력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임을 말씀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죽을 때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아셨던 것일까요? 예수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도 십자가 지는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예수는 지금 자신과 동행하고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같이 동행하고 있지만,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날카로운 지적인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결국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것에 실패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소개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삶의 결과가 십자가라니 아마 제자들은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 제자들과 무리들은 십자가가 “대속”의 의미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처형은 로마에 저항하는 자의 모든 삶을 가장 수치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죽음에 이르는 모든 순간과 죽음 후 시체를 처리하는 모든 순간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형벌이었기에 십자가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며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군가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수치를 “대신 당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나아가셨습니다. 식민지 피지배자이기에, 여성이기에, 장애인이기에, 고아와 과부이기에, 폭력에 시달려 귀신들렸기에 그 누군가에게 당연하게 가해지는 수치를 대신 당하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대신 지기 위해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제자들과 무리들을 초대하십니다. “너희도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대속”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버틸 수 없는 누군가의 수치를 대신 짊어지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와 무리들을 초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차별 가운데 고통받는 이들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소수자이기에, 여성이기에,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여러 이유로 수치와 차별을 당하는 이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가려면 우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있어야 친구가 되어 그의 수치를 덮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런 존재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십자가를 함께 지고 살아감으로,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함께 목숨(프쉬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9 Feb 2026 07:32:2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2"><![CDATA[설교]]></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8일/ 주현 후 제5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89]]></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6"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208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7"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208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9 Feb 2026 07:29: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2월 1일/ 주현 후 제4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88]]></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3"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201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4"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201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9 Feb 2026 07:22: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1월 25일/ 주현 후 제3주]]></title>
			<link><![CDATA[https://www.edenchurch.net/?kboard_content_redirect=687]]></link>
			<description><![CDATA[<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0"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125001.png" alt="" width="1200" height="992" /> <img class="alignnone size-full wp-image-53371" src="https://www.edenchurch.net/wp-content/uploads/2026/02/20250125002.png" alt="" width="1200" height="992" />]]></description>
			<author><![CDATA[edencommunity]]></author>
			<pubDate>Mon, 09 Feb 2026 07:20: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edenchurch.net/?kboard_redirect=3"><![CDATA[주보]]></category>
		</item>
			</channel>
</rss>